이 글을 "바쁜 건 알지만 자기 문제는 아니고 그저 본인이 나오는 글이 제일 재밌다며 빨리 올리라"는 동생에게 바칩니다.
동생과 둘이 떠난 동남아 배낭여행. 거의 한달 정도 나라들을 돌아다녔다.
배낭여행에 꽂혀서 정말 배낭하나 들고 갔는데 결국 거지꼴이었다.
저때는 어려서 배낭에 호스텔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캐리어 짱짱하게 채워서 리조트로 갈꺼다.
그냥 말로만 "동남아 백팩킹하면 너무 재밌겠다" 라고 수다를 떨다가 갑자기
흐름을 타서는 순식간에 비행기까지 다 예약하고 숙박을 고르고 짧은 시간동안 먹을 음식들과 이벤트를 정리했다.
당시 둘다 각자 다른 지역에서 자취를 하던때라 여행준비하면서 열심히 엑셀을 만들어 이메일로 준비를 해갔다.
그렇다, 나는 여행준비를 엑셀로 하는 사람이다.
동생은 뭐 이렇게 까지 하냐고 했지만 이런 내 성격을 알고
본인은 아주 가끔 "여기 가서 이거 꼭 먹자", "여기 가면 이거는 해보자" 정도의 인풋을 넣었을 뿐
결국 동선과 가격, 예약 등등 모든 일을 내가 맡았다.
나도 내가 하는게 차라리 속편하고 동생은 본인이 안해도 되니까 몸도 마음도 편한 그런 여행 메이트.
이게 정말 일어나는 건가 싶기도 했고 또 시작하니 순식간에 정리가 되어가는걸 보면서
아, 우리가 가긴 갈건가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갈 곳이 정말 많지만 우리가 이번에 고르고 골라 결정한 나라는 총 5곳.
베트남, 라오스,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태국이었다.
베트남은 굉장히 긴데 도시마다 꽤 다르다고 들어서
처음에는 호치민 IN 으로 마지막에는 하노이 OUT으로 일정을 짜서 둘다 가보기로 했다.
같이 있으면 일정 정리하는데 편할텐데 우리는 급하게 바뀌는게 있으면 문자를 하거나 전화를 하면서 준비를 해갔다.
- 동생아 너 여행 버짓이 얼마니.
- 없음
- !!
이녀석, 멋진데?
사이 좋은 동생이랑 여행을 갈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다.
취향이 100프로 같지는 않지만 서로에 대해 잘 알고 둘다 딱히 가리는게 없어서 여행메이트로는 최고다.
그치만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건 많고 정해진 시간안에 할 수 있는건 적다.
옵션을 고를 때는 서로의 취향을 존중해야한다. 아니면 여행가서 개판된다.
2박3일이면 그냥 에이 시간도 없는데 참고 좋게 좋게 넘어가자~할텐데
한달이나 붙어있게 되면 육체적, 정신적으로 분명 지칠 때가 오기 때문에 백프로 싸운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가는게 좋다.
미리 엑셀에 넣자. (전쟁 2pm-6:30pm, 저녁밥 6:30pm-7:30pm, 냉전 8pm-...)
우리도 여행 도중 한번 대판 싸웠다.
각자 공항에서 출발해서 인천국제공항에서 만나 같이 베트남으로 들어가는 플랜이었다.
내가 먼저 출발하고 동생이 조금 더 늦은 시간이 출발하면 거의 같은 시간에 도착하기 때문에
우리끼리 펄펙트 플랜이라면서 좋아했다. 신난다.
D-day
이제 시작될 여행에 대한 기대감인지 우리가 한달동안 큰 문제없이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걱정인지는 몰라도
밤새 뒤척거리다가 잠을 못잤다. 밤에 몇번이고 깨서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공항까지 가는데 미리 셔틀을 예약해 두었기 때문에 시간에 맞춰 픽업 장소로 가야했다.
Problem #1. 아침부터 트래픽.
아침 6시부터 트래픽이 그렇게 심하지 않을 거라고 착각한 내 탓에 셔틀을 놓칠까봐 진짜 심장이 터질 뻔 했다.
미친듯이 가는데 그 와중에 셔틀기사한테서 어디냐면서 전화가 왔다.
픽업 예약시간보다 15분이나 더 이른 시간이었는데 뭐지? 하고
아직 예약 시간이 아니라고 했더니 그럼 자기는 시간 땡하면 가겠단다.
아 진짜 울고 싶었다. 저걸 놓치면 어떻게 공항까지 가야하나. 차는 어떻게 하지. 등등
머리속에 온갖 생각이 드는데 트래픽을 뚫고 간신히 도착했다.
몇분이 살짝 오버였지만 도착하기 전에 나 도착 3분전이라고 제발 가지말라고 전화를 해서 간신히 셔틀을 탔다.
셔틀기사는 나때문에 몇분 늦었다고 기분이 안좋으셨는지 엄청 툴툴대셨다
5분정도 늦은 걸 가지고 저렇게 툴툴댈일인가 (집에서 문열고 나와도 저정도는 기다리겠다..) 싶었는데
어쨋든 내가 늦어서 잘못한거니 안버리고 기다려줘서 고맙다고 몇번이나 말했다.
잠도 못자고 아침부터 너무 긴장하느라 몸이 놀랐는지 머리가 엄청 아팠다.
셔틀에는 나말고 3명이나 더 탔는데 그중 할아버지 한분이 수다를 좋아하시는지 자꾸 나한테 말을 거셨다.
평소같으면 같이 얘기했겠지만 이때는 머리가 빠개질거같아서 제발 조용히 갔으면 했다.
간신히 공항에 도착해서 티케팃을 하러 카운터로 갔다.
내 차례를 기다렸다 안녕하세요~하면서 여권을 드렸다.
- 비자있으세요?
- 아니요. 도착하면 거기서 받으려구요. 공항에서 받을 수 있다고 봤는데..
- 아 그러면 pre-approval 서류 주세요
- 네? 그런거 없는데
- 그럼 티켓팅 안되세요
우리는 비자가 필요한 경우였는데 둘다 제대로 알아보지 않아서
미리 pre-approval 서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니 하롱베이 투어까지 다 예약해놨는데 왜 도대체 이거를 몰랐을까.
그쪽 업체에서도 분명 무료로 처리해준다고 했었는데.ㅠㅠㅠ. 아 이걸 어떻게 해야하지?
- 인천공항에서 몇시간동안 스탑오버가 있는데 그때 받으면 안되나요
- 여기서 보딩이 안되기 때문에 인천까지도 못가요. 지금 express로 받아보세요.
Problem #2. 비자가 없어서 티켓팅 불가.
이때 쯤에는 진짜 머리가 너무 아파서 토하고 싶었다. 이 정도의 두통은 살면서 처음이야.
심지어 동생도 본인 도시 공항으로 향하고 있는 상황. 이걸 어떻게 처리하냐에 따라서 남은 한달의 여행이 결정된다.
심지어 모든 비행기와 호텔등이 전부 일정에 맞춰 이미 예약되어있는 상태라 하나가 틀어지면 모든걸 다 바꿔야 한단 말이다..
망했어. 다 망했다고!!
급하게 인터넷을 뒤져 여행사 웹사이트를 찾아 express서비스로 비자를 신청했다.
아무리 비싼 돈 주고 제일 빠른걸 했다고 해도 티켓팅 시간 안에 맞춰서 편지가 오기는 불가능한 상황.
이럴때는 말빨로 넘어가야한다.
비자 신청을 했다는 영수증 페이지를 갖고 다시 그 항공사 직원분께 가서 구구절절 설명을 했다.
1. 지금 바로 처리 될 확률은 0.
2. 그대신 스탑오버가 되면 확인할수 있다.
3. 티켓팅을 인천까지만 해주고 거기서 편지보여주고 나머지 티켓팅을 하겠다.
4. 그때까지 처리 안되서 못타는건 내가 책임지겠다.
다행히 나를 불쌍하게 봐주셨는지 직원분께서 매니저님을 찾아 물어보셨고
티켓팅을 해주는 대신 환불이나 다른 것들이 안된다는 조건에 동의를 하고 내 여권사진까지 찍어가셨다.
이러나저러나 간신히 첫 비행기 티켓을 받을 수 있었다. 아 진심 속이 울렁울렁 토할 것 같았다.
그치만 지금 그럴 시간도 없다.
빨리 (아직 어떤 상황인지 저언혀 모르고 있는) 동생한테 설명을 해줘야
얘도 티켓팅을 할 수 있기 떄문에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받아라. 받아 좀..
이럴거면 핸드폰을 왜 들고 다니니. 받으라고!!
간신히 연락이 된 동생한테 상황을 설명했다.
너도 없어서 아마 직원들이 안된다고 할꺼다. 빨리 가서 영수증 준비하고 내가 한대로 얘기를 해봐라.
나는 보딩시간이 다가와서 게이트 앞에서 앉아 동생의 답변을 기다렸다.
티켓을 못주겠대, 라는 문자까지 보내놓고 연락이 안되는 동생.
이러다 못만나는거 아닌가 하는 걱정에 두통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나 여기서 쓰러지는 거 아녀.
진짜 이 짧은 아침사이에 한 5년은 늙은 느낌이었다. 내 피부 푸석해졌을꺼야. 느껴져.
보딩까지 하고 제발 비행기 뜨기 전에 대답해라, 라면서 핸드폰을 붙잡고 있는데
"법적 동의서까지 작성을 하고 난 후에 간신히 티켓을 받았다"는 동생의 문자를 받고는 온몸에 긴장이 다 풀렸다.
긴장이 풀린건지 근육의 컨트롤을 잃어버린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의자에 무너져버리는 느낌이었다.
아 제대로 준비를 안했더니 이렇게 돈낭비와 스트레스로 범벅이 되어 여행을 시작하는 구나.
내가 암걸리면 진짜 오늘 떄문이다. 누굴 탓할 수도 없고 전부 내 바보짓이라 더 짜증이 났다. 아이고 이 등신.
이미 비행기는 활주로에서 택시 중이었고 나는 이제 비행기가 뜨니까 제발 인천에서 보자는 카톡을 보내고 핸드폰을 껐다.
음료 서비스가 시작되자마자 위스키를 달라고 해서 콸콸 부었다.
최근에 이렇게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적이 있었나.
이제 남은 건 긴 비행시간을 버텨서 인천에 도착하는 일. 비행기가 뜬지 한시간 정도 지나서 갑자기 티비가 꺼졋다.
뭐야. 내 영화 돌려줘요.
승무원분께서 오셔서 다시 재부팅중이라고 하시더니 한 30분이 지나도 다시 켜지지 않았다.
아예 우리 섹션의 티비가 다 맛탱이가 가버려서 티비를 보고 싶으면 자리를 옮겨준다고 했다.
가지가지, 하다하다 이제는 별 ..
그치만 이미 자리를 잡고 앉은 나는 다른 곳으로 옮기기에 너무 지쳐 있었다.
그냥 앉아서 인천에 도착했을 때 이메일이 안왔으면 어떻게 해야하나 이런저런 방법을 생각했다.
베트남을 스킵하고 바로 라오스로 간다. 베트남가서 기다린다 (티켓팅 안해주면 못 감),
그러고보니 공항에서 동생은 어떻게 만나야 하나, 티켓을 받고 트랜스퍼 하는데 보딩타임에 맞출 수 있으려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넘어가는데 그 와중에 밥이 나왔다.
밥.. 밥을 먹자..
이코노미의 스테이크는 실패였다.
(나중에 비지니스 스테이크도 크게 실패함. 한국 국적기는 한식을 먹자. 퍼스트는 안타봐서 모름.)
다음밥은 그냥 한식으로 골랐다. 예스. 한식.
비빔 고추장만 줘도 벌써 맛있다. 동남아 가려면 저거 몇개 챙겨가면 굿임.
차라리 잠이라도 잘 수 있으면 좋을텐데 잠자리에 굉장히 예민한 나는 비행기에서도 잠을 잘 못잔다.
앉아 있는 내내 티비도 안되고 음악을 듣던 핸드폰도 꺼졌고 시스템이 다운이라 충전도 안됐다.
시벌. 비행기값에서 전기세 빼줘요.
그렇게 고민에 고민난 하다가 일기를 정리하고 어느덧 인천에 내릴 시간이 다가왔다.
와이파이가 잡히는 순간 새로고침을 눌러야한다.
Moment of truth. 그 놈의 이메일이 와있어야 한다.
We learned the hard way, 라는 말처럼 저엉말 힘들게 배우고 있었다.
이놈의 여행 좀 쉽게 가면 안되나. ㅎ긓그 .. 머리가 나쁘니까 몸이 정말 제대로 고생한다.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와이파이부터 잡았다.
신이시여..!! 이메일..
EMAIL!!! 제발..!!!!
YEEESSSSSSS
됐어!! 됐다고!!!
인천공항 터미널을 신나서 달려갔다. 동생아 우린 살았어. 어딨니.
이제 동생을 찾아 인천공항 안에 있는 카페에서 프린트를 해서 티켓팅을 마무리하고 면세를 찾아야했다.
하.. 면세는 도대체 왜 사놨을까? 이렇게 정신이 없을 줄 알았다면 절대 사지 않았을텐데.
여행하면서 피부 관리를 해야한다고 화장품이랑 팩을 샀는데 진짜 겁나 무거웠다.
(백팩킹한다고 배낭 하나 메고 왔으면서..)
과거의 나야!! 왜 샀냐고!! 이 멍청아..
동생이랑은 간신히 연락이 되서 어디 뭐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이랬는데
커뮤니케이션 문제로 한참을 헤매다 만났다. 터미널이 다 거기서 거기 같아.. 이런 덤앤더머같으니라고.
간신히 티켓팅을 하고 그 다음부터는 큰 문제 없이 잘 진행됐다.
보딩게이트 앞에 앉아서 한숨을 푹 쉬고는 진짜 스펙타클했다 하면서 부모님한테도 연락을 드렸다.
둘다 의자에 퍼져서는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겠다면서 정신줄을 놔버렸다.
호치민행 비행기에 앉아 동생이랑 일정 이야기를 하면서
"이제 시작이군.. 근데 왜이렇게 피곤하지" 이라며 여행을 시작했다.
아직 베트남 입국도 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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